이스라엘 연구진, 4만5000 게놈DB 탐색해
제한효소·유전자가위 외 다른 도구 나올까
면역 시스템의 진화, ‘공통 기원’ 보여줄까
박테리아는 파지 바이러스(작은 공 모양)의 공격에 맞서서 다양한 면역 방어 시스템들을 갖추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연구진이 이전까지 몰랐던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시스템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제공
박테리아는 파지 바이러스(작은 공 모양)의 공격에 맞서서 다양한 면역 방어 시스템들을 갖추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연구진이 이전까지 몰랐던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시스템들을 여럿 발견했다.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제공
‘파지’(박테리오파지)라 통칭되는 바이러스들은 박테리아(세균)의 천적이다. 박테리아라고 그저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박테리아는 파지 바이러스들의 공격에 맞서서 자체의 면역 방어 체제를 갖추고 있다.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체제는 현대 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흔히 ‘유전자 가위’로 불리는 크리스퍼-카스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식별해 잘라버리는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시스템에서 빌려와 유전체공학 기법으로 개발한 분자 복합체이다. 1970년대 이래 디엔에이 재조합 기술을 이끌며 생명과학의 핵심 도구가 된 ‘제한효소’ 분자도 박테리아의 대표적인 면역 방어 시스템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면역 방어 시스템이 박테리아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하는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밝혀졌다. 면역 방어의 진화를 이해하려는 연구나 유전체공학의 새로운 도구를 찾으려는 연구 분야에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소식으로 받아들여진다.

후보 유전자 걸러내기, 그리고 검증하기

이스라엘 바이츠만과학연구소 연구진(로템 소렉/Rotem Sorek 등)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시스템으로서, 파지 바이러스의 공격에 저항하는 아홉 가지의 유전자 세트, 외래 유전물질인 플라스미드의 침입에 대항하는 한 가지의 유전자 세트를 발견했다고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최근 보고했다. 이번에 발견된 면역 방어 시스템에는, 여러 민족 신화에 등장하는 수호신들의 이름(이집트의 테오리스/Theoris, 슬라브족의 조르야/Zorya 등)을 붙였다.

바이츠만연구소의 보도자료와 관련 언론매체의 보도들을 보면, 연구진은 크리스퍼-카스나 제한효소처럼 알려진 것 외에 알려지지 않은 박테리아 면역 방어 시스템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이 연구에 착수했다. 연구진 6명이 2년 동안 지속한 이 연구는 크게 보아 ‘후보 유전자 걸러내기’와 ‘면역방어 기능 검증하기’를 거쳐 이뤄졌다.

먼저, 후보 유전자 걸러내기. 연구진은 면역 방어 유전자들이 모여 군집을 이루고 있을 것이라는 데 착안해 수많은 박테리아의 게놈 정보 데이터베이스에서 이미 알려진 방어 유전자 주변에 있으면서도 아직 기능이 밝혀지지 않은 유전자들을 걸러내는 탐색 작업을 벌였다. 탐색 작업에는 연구진이 개발한 컴퓨터 소프트웨어에다 이미 공개된 박테리아 4만5000여 건의 게놈 정보 데이터베이스가 사용됐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후보 유전자는 수백만 종에서 수백 종으로 걸러졌고, 여기에서 다시 연구진은 검증 실험의 대상인 유전자 시스템을 26종으로 압축했다.

다음은 유전자 기능 검증하기. 연구진은 합성생물학 기업에 의뢰해 제작한 검증 대상 26개 유전자 세트를 실제 박테리아들에다 하나하나씩 집어넣어 그 유전자가 실제 면역 방어 기능을 하는지 살폈다. 모델생물로 쓰인 박테리아(대장균 등)에서는 본래 있던 면역 기능이 제거되어, 검증 대상 유전자 세트만이 발현할 수 있게 했다. 연구진은 파지 바이러스와 플라스미드에 노출된 모델생물 박테리아들에서 일어나는 면역 방어 기능을 살핌으로써, 최종적으로 열 가지의 방어 시스템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발견된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유전자 세트 중에서, 아홉 가지는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것이었으며 한 가지는 플라스미드에 대항하는 것으로 판별됐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자연에서 박테리아와 고세균 미생물의 생존과 진화를 이끄는 중요한 생명현상임이 밝혀지고 있다. 현미경 영상은 박테리아 세포막에 달라붙어 침투 공격을 하는 바이러스들(녹색)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자연에서 박테리아와 고세균 미생물의 생존과 진화를 이끄는 중요한 생명현상임이 밝혀지고 있다. 현미경 영상은 박테리아 세포막에 달라붙어 침투 공격을 하는 바이러스들(녹색)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방어 메커니즘 규명 우선과제

이번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다. 무엇보다 제한효소와 크리스퍼-카스가 유전공학, 생명과학에 크나큰 변화와 발전을 일으켰듯이, 새로 발견된 박테리아의 면역 방어 시스템에서 과연 또다시 새로운 생명과학의 분자 도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냐 하는 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생명과학 전문매체인 <더 사이언티스트>는 “박테리아 면역 시스템에서 가져온 제한효소, 그리고 크리스퍼-카스9 분자의 발견은 분자생물학에 혁명을 가져다주었다”면서 몇몇 연구자들의 전망을 인용하며 “연구자들은 (새로 발견된 면역 시스템의) 작용 메커니즘이 더 규명된다면 그 면역 시스템들은 분자생물학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기대는 박테리아의 다양한 면역 시스템들이 우리 면역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에 무언가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지만 일부 유전자 세트의 성격도 규명됐는데, 일부는 식물이나 동물에도 있는 면역 시스템이 박테리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점들은 아주 오랜 진화해온 면역 방어 시스템에 있었을 공통조상의 흔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들은 향후에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에 대한 현대 의학의 대응전략에도 도움을 줄 수도 있으리라 기대된다.

아직은 새로 발견된 박테리아 면역 방어 유전자들의 실제로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의 메커니즘이 이번 연구에서 충분히 규명되지는 못했다. 연구진은 이번에 발견된 유전자들의 자세한 기능과 메커니즘을 밝히는 것, 그리고 더 있을지 모를 다른 면역 방어 유전자들을 찾는 일이 향후 후속 연구들의 과제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단순한 미생물로 여겨지던 박테리아가 크리스퍼-카스 같은 정교한 면역 방어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 데 이어 이번에 더 많은 면역 방어 유전자들이 발견되면서, 아직은 더 많은 연구들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그동안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정교한 면역 방어 시스템을 박테리아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은 확인되고 있는 셈이다.

■ 초록

박테리아와 파지 간의 [공격과 방어] 군비 경쟁은 크리스퍼-카스와 제한효소 시스템 같은 정교한 바이러스 방어 시스템을 낳았다. 그동안 발견된 증거는 미지의 방어 시스템이 미생물 게놈(유전체)에 [여기저기 떨어져서 모여 있는] 이른바 ‘방어의 섬들(defense islands)’에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원핵생물의 게놈에서 이미 밝혀진 방어 유전자들의 곁에 모여 있는 유전자 군을 조사하는 방식으로 박테리아 방어 시스템의 특징을 포괄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후보로 꼽힌 방어 시스템 유전자들을 체계적으로 제작했으며 그 유전자들이 파지 대항 기능을 지니고 있는지를 모델생물 박테리아를 통해 검증했다. 우리는 미생물에 널리 퍼져 있으면서 외부 침입자에 맞서 강력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아홉 가지의 파지 대항 시스템, 그리고 한 가지의 플라스미드 대항 시스템을 보고한다. 여기에는 박테리아 편모와 콘덴신 단백질 복합체 같은 요소를 이용하는 시스템도 포함돼 있다. 또한 우리 데이터는 동물, 식물, 박테리아가 공유하는 선천성 면역 요소들의 먼 공통조상을 보여준다.